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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은 다 똑같이 녹는다고 생각하셨다면, 저도 한때 그랬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PP 조건을 잡던 날, 노즐에서 수지가 콧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비정질과 반정질은 열을 받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모르고 조건을 잡으면, 버(Burr)와 미성형(Short shot)이 번갈아 가며 현장을 괴롭힙니다.

ABS와 PP, 같은 열을 받는데 왜 이렇게 다를까 — 분자구조 이야기
혹시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실린더 온도는 비슷하게 맞췄는데 왜 어떤 수지는 얌전히 녹고, 어떤 수지는 갑자기 왈칵 쏟아지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 답은 폴리머 사슬 배열에 있습니다. 비정질 폴리머(Amorphous Polymer)란, 분자 사슬이 일정한 규칙 없이 마치 한 움큼 집어 던진 실타래처럼 무작위로 엉켜 있는 구조를 말합니다. ABS가 대표적입니다. 이 구조 덕분에 열을 가하면 특정 온도를 기점으로 '왈칵'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온도가 오를수록 서서히 점성이 낮아지며 늘어납니다. 마치 냉장고에서 꺼낸 버터가 실온에서 서서히 부드러워지는 것처럼요.
반면 반정질 폴리머(Semi-crystalline Polymer)는 분자 사슬이 질서 있게 정렬된 결정 영역과, 무작위로 뒤엉킨 비정질 영역이 한 성형품 안에 공존하는 구조입니다. '반(半)'이라는 표현이 붙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PP, 나일론이 대표적인데, 이 수지들은 융점(Melting Point)에 도달하기 전까지 딱딱한 상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합니다. 얼음이 -10℃든 -0.5℃든 두드리면 똑같이 딱딱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더 골치 아픈 건 반정질 수지가 용융되려면 두 가지 에너지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융점까지 온도를 올리는 에너지에 더해, 질서 있게 정렬된 사슬 구조 자체를 깨트리는 융해열(Heat of Fusion)까지 넘어서야 비로소 녹습니다. 실제로 나일론 6 1kg을 용융하는 데는 약 716 BTU/kg의 에너지가 필요한 반면, ABS는 약 342 BTU/kg에 불과합니다(출처: 플라스틱코리아). 가공 온도 자체는 비슷해도 투입 에너지량이 거의 두 배 차이나는 겁니다.
제가 PP 초물 조건을 잡던 날이 딱 이 상황이었습니다. ABS를 다루던 감각으로 실린더 온도를 조금 넉넉하게 올렸더니, 수지가 융점을 넘어서는 순간 점성이 확 낮아지면서 노즐에서 드룰링(Drooling), 즉 수지가 흘러내리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당황한 채로 사출을 넣었더니 파팅라인 사이로 버(Burr)가 쫙 퍼져 나왔고, 그날 하루는 금형을 닦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온도를 조금 올렸을 뿐인데 이 정도로 다를 줄은 몰랐거든요.
- 비정질(ABS): 분자 사슬이 무작위 배열 → 온도 상승에 따라 점진적으로 점성 감소 → 가공 허용 폭 넓음
- 반정질(PP, 나일론): 결정 영역 + 비정질 영역 공존 → 융점 직전까지 딱딱함 유지 → 융해열 추가 에너지 필요
- 용융 에너지 차이: 나일론 약 716 BTU/kg vs ABS 약 342 BTU/kg (약 2배 차이)
버와 미성형 사이, 스크류 설계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 ABS vs PP 현장 경험
그렇다면 스크류(Screw)만 잘 고르면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스크류 하나만 바꾼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수지 특성에 맞게 공정 변수 전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게 맞는 표현입니다.
사출 배럴 내부를 보면, 스크류가 회전하면서 펠렛(Pellet)을 이송구간 → 압축구간 → 계량구간 순서로 밀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의 약 80%는 배럴 벽과 펠렛 사이의 마찰, 그리고 스크류 압축에서 나옵니다. 나머지 20% 정도가 배럴 외부를 감싼 히터밴드(Heater Band)에서 전달됩니다. 이 비율은 비정질이든 반정질이든 동일합니다.
문제는 반정질 수지가 고형 상태를 오래 유지하다 보니, 스크류 압축구간에서 솔리드 베드(Solid-bed)가 쉽게 붕괴된다는 점입니다. 솔리드 베드 붕괴란, 펠렛들이 배럴 벽과 스크류 플라이트가 만나는 압축 지점에 고르게 닿지 못해 일부는 에너지를 받고 일부는 받지 못하면서 용융이 불균일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 결과 완전히 녹지 않은 펠렛이 계량구간까지 떠내려와 성형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스크류 마모까지 유발합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L/D 비율(배럴 길이와 직경의 비율)이 20:1인 범용 스크류로 PP를 가공했을 때 이송구간 플라이트가 다섯 개밖에 되지 않아 숏 사이즈(Shot Size, 1회 사출량)가 배럴 용량의 40%를 넘어가자 용융 불균일이 두드러졌습니다. 두껍고 얇은 살두께가 혼재된 제품이었는데, 얇은 부위는 미성형이 나오고 두꺼운 부위는 버가 함께 나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불량이 반복됐습니다.
일반적으로 배리어 스크류(Barrier Screw) 사용을 권하는 의견도 있지만, 제 경험상 열 체류 시간이 길어지면서 오히려 수지 열화(Degradation)로 흑점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열화란 수지가 필요 이상의 열에 장시간 노출되어 분자 구조가 분해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흑점 외에도 강도 저하나 변색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저는 배리어 스크류 대신 L/D 비율 최소 20:1, 가능하면 24:1 이상으로 용융 균일성에 최적화된 설계를 선택하는 쪽을 권하고 싶습니다(출처: SPE(Society of Plastics Engineers)).
또 하나 간과하기 쉬운 포인트가 있습니다. 액상 안료를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액상 안료 캐리어에 포함된 오일 성분이 펠렛과 배럴 사이의 마찰을 줄여버려, 용융에 필요한 에너지 전달 효율을 떨어뜨립니다. 이럴 때는 액상 안료 공급을 잠깐 멈추고 스크류 회전 시간이 줄어드는지 확인해 보시면 원인을 빠르게 좁힐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엔 이 방법으로 원인을 찾은 적이 두 번 있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ABS 찍던 조건 그대로 PP에 적용하면 안 되나요?
A. 안 됩니다. ABS는 온도에 따라 서서히 점성이 변하지만, PP는 융점을 넘는 순간 점성이 급격히 낮아집니다. ABS 기준 온도를 그대로 적용하면 드룰링이나 버 불량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지별로 추천 가공 온도 범위를 반드시 별도로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Q. 반정질 수지 가공할 때 범용 스크류를 쓰면 무조건 문제가 생기나요?
A. 무조건은 아니지만, 숏 사이즈가 배럴 용량의 20% 미만이거나 40%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솔리드 베드 붕괴로 인한 용융 불균일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소량 시제품이나 단기 작업이라면 크게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치수 정밀도가 요구되는 양산 제품이라면 전용 설계 스크류를 검토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Q. 용융 불균일을 현장에서 빠르게 알아채는 방법이 있을까요?
A. 성형품에 미성형과 버가 동시에 나타나거나, 치수 산포가 커지는 경우 용융 불균일을 먼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계량 시간(스크류 회전 시간)이 숏마다 들쭉날쭉하다면 솔리드 베드 붕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액상 안료를 사용 중이라면 일시적으로 공급을 중단하고 스크류 회전 시간 변화를 확인해 보는 것도 빠른 진단 방법입니다.
Q. 비정질 수지는 용융 관리가 정말 더 쉬운 건가요?
A. 상대적으로 그렇습니다. 비정질 수지는 융점이라는 급격한 전환점이 없고 온도 변화에 따라 완만하게 점성이 바뀌기 때문에 가공 허용 폭이 넓습니다. 완전히 용융되지 않은 펠렛이 있더라도 마쉬멜로우처럼 물렁한 상태라 스크류와 배럴에 심각한 마모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만 비정질 수지도 숏 사이즈 비율이 극단적으로 낮거나 높으면 균일성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결론
현장에서 원인 모를 불량으로 며칠째 씨름하다 보면, 결국 '이 수지가 어떻게 녹는가'라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비정질 수지는 서서히 녹는 낭만이 있고, 반정질 수지는 딱딱하게 버티다 순식간에 녹는 까다로운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PP 조건을 망친 그날 이후, 새 수지를 접할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이게 비정질이야, 반정질이야?"
수지 분자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사출 조건 설정의 출발점입니다. 스크류 설계, 온도 프로파일, 배압 설정, 사출 속도 모두 결국 이 수지가 어떻게 녹는지를 기준으로 맞춰져야 합니다. 호퍼에 지금 들어가 있는 수지가 비정질인지 반정질인지부터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불량의 뿌리가 거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plastic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085&page=4&total=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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